"이봐!, 해보기는 했어!!" 정주영, 그 거인의 발자취를 쫓아서

들어가는 말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이 사람만큼 우리 현대사의 질곡과 영욕의 세월을 함께 한 사람이 또 있을까.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6.25, 4.16, 5.16등 대한민국 그 격동의 시기를 온몸으로 감내하며 이 시대의 거인으로 뚜렷한 족적을 남긴, 정 주영 회장!! 모두가 알다시피 국졸이 학력의 전부였지만 이 땅의 지식인 모두를 합해도 그의 천재적 발상과 과감한 실천력은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주어지는 자본금'이라는 말을 믿고 신념의 바탕 위에서 최선을 다한 노력을 쏟아부으며 평등하게 주어진 자본금을 열심히 잘 활용했던 사람 중의 한 사람일뿐이라는 거인의 발자취 속으로 들어가 본다.
거인의 나라 대한민국
그 시대 우리 농민들의 가난은 그야말로 필설로 형언하기 힘들 지경이었다.그저 하늘만 올려다보며 일기가 순조로워 풍년 들기만을 기원하던 그 시절의 농촌은 일 년 내내 죽을 둥 살 둥 허리가 부러지게 일하고 다행히 풍년이 들어도 간신히 일 년 양식이 될까 말까였다. 가진 농토는 손바닥만 하고 농사짓는 법은 원시적이고 농기구도 변변찮고 비가 조금만 많이 왔다 하면 홍수가 망치고, 봄비가 조금만 늦게 와도 흉년, 우박이 잠깐 내려도 흉년, 서리가 조금 일찍 내려도 흉년, 운 좋은 풍년이 한 해면 두 해는 연달아 흉년이고 했다. 절망과 탄식조차도 사치였던 그 가시밭길을 거인은 헤쳐 나왔다. 혼자만 빠져나온 게 아니라 그가 펼치는 판마다 우리 국민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그에게는 불가능이 없었다. 아니 불가능한 일이 생겨도 그것을 가능으로 기어이 만들어 내는 백절불굴, 엄청난 긍정의 아이콘이었다.
거인의 시대정신 그리고 ,활약상
소양감 댐 이야기
1967년 최저 가격 입찰로 따낸 소양강 댐공사는 일본공영이란 회사가 설계에서, 기술, 용역까지 맡아서 콘크리이트 중력댐으로 건설되는 것으로 확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정주영, 그 거인은 이 소양강 댐 공사를 설계비, 기초 자재비, 기술용역비는 물론, 철근, 시멘트, 엄청난 물량의 기자재 값까지 전부 일본으로 되돌아가게 하려는 속셈을 간파하고 대안을 제시한다. 그것도 조그만 건설사의 댐 건설 경험도 일천한 신출내기가. 하지만 정주영은 달랐다. 주변에 얼마든지 있는 흙과 모래자갈을 이용해서 사력(砂礫) 댐으로 설계를 변경시키게 한다. 세계 유수의 댐을 건설한 전문가가 즐비한 '일본 공영'과 건설부 직원에게도 엄청난 욕바가지를 뒤집어쓰면서 기어이 사력댐을 관철한 거인은 이 시대에 정면승부를 걸어온 우리 민족혼의 표본 아녔을까?
나보다 더 미친 사람을 찾으러 나서다.
"그날부터 나는 존재하지도 않는 조선소에서 만들 배를 사줄 선주를 찾아 나섰다!!" 울산 미포만의 초라한 백사장 사진, 1/50,000 짜리 그 지역 지도 한 장, 스코트 리스고우에서 빌린 26만 t급 유조선 도면을 들고 다니면서 " 당신이 이런 배를 사준다고만 하면 내가 영국에서 돈을 빌려 이 백사장에 조선소를 짓고 배를 만들어 주겠다."라고 미친 사람 취급 당하기 십상인 소리를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거인은 온갖 시련과 악조건 속에도 굴하지 않고 무려 영국 정부의 차관을 얻어 조선소를 건설하면서 배를 건조해내는 세계 조선사에 길이 남을 기념비적인 사업을 성공적으로 해낸다.
주베일의 드라마
사우디 주베일 산업항 공사는 그 금액부터 스케일이 달랐다. 당시 환율로 4,600억 원이었는데, 그 금액은 우리나라 정부 예산의 절반 수준이었다. 이 공사에도 현대 건설은 고개를 디민다. 1975년 사우디 국왕의 주베일 산업항 계획을 받아 영국 용역회사가 제작한 설계도 검토가 시작된다. 당시 현대 건설의 중역들은 약속이나 한 듯 모두가 '안된다' 뿐이었지만 나는 이공사에 뛰어들었다. 해상과 육상에 걸친 토목 부문의 거의 모든 공정과 건축, 전기, 설비 부문까지 총동원된 종합건설 공사로 50만 t급 유조선 4척을 동시에 접안시킬 수 있는 해상 터미널 공사는 구조물 제작에서부터 수송 하역, 설치까지 마쳐야 하는 대단히 어려운 공사였다. 하지만, 그는 그 숱한 난관에도 불구하고 완벽하게 공사를 해내고야 만다.
88 올림픽 유치
80년이 되자 , 당시 올림픽 유치를 두고 일본 나고야를 이기고 올림픽을 유치해 온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분위기였다. 정부는 진퇴양난에 빠졌다. 올림픽 유치 신청서를 접수해서 조사단이 개최 여건 조사까지 마쳤고, 더구나 올림픽 개최의지 재확인을 받은 상황에서 돌연 올림픽 유치 철회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유치 가능성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정부 관료들이 내놓은 대안이 '망신을 당해도 정주영 네가 당해라'는 정부의 의도였다. 하지만 그는 유치민간위원장이 되자 달랐다. 그는 자비로 대한민국 홍보 영상을 만들었고, IOC위원들의 부인을 뒤흔든 비책을 내놓다. 꽃바구니를 매일같이 새로운 꽃으로 교체를 하며 싱싱하고 향기로운 마음의 선물로 표심을 사로잡아 엄청난 표차로 나고야를 잡고 당당하게 유치를 해 내고야 만다.
그가 남겨 놓은 자산들
그는 세계 건설사에 전무후무한 드라마를 쓴다. 서산 방조제 공사!!.
그런데 착공 5년째 되던 1984년에 최종 물막이 공사는 가장 어려운 문제에 봉착했다. 방조제의 길이는 6,400여 미터였는데,
그중 마지막 남은 270미터를 쌓을 수가 없었다. 초속 8미터의 무서운 급류가 흘렀기 때문이다. 한강이 여름 홍수 때 초속 6미터로 흐르니, 그 세기가 얼마나 빠른지를 비교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자동차만 한 바위를 넣어도, 30톤 덤프트럭들이 끊임없이 돌을 날라도, 거센 물살은 이 모든 것을 한 번에 휩쓸어 가 버렸다.
이때 정주영은 원래 유조선으로 사용하던 23만 톤급 스웨덴 배를 떠올린다. 였다. 현대가 해체해서 고철로 팔기 위해 30억 원을 주고, 사들였고, 울산에 정박시켜두고 있었다. “폭 45미터, 높이 27미터, 길이는 322미터. 충분해! 천수만호 이 배로 막아두고 메우면 어떨까?” ” 건축학 어디에도 없는 ‘유조선 공법’이 성공할지 실패할지 세간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천수만호가 서산에 도착했다. 수많은 취재진 앞에서 유조선 가라앉히기가 시작됐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그렇게 애를 먹이던 물막이 공사가 22일 만에 끝이 났다. 어려운 공사를 해결해서 얻은 열매는 달고도 달았다. 이 유조선 공법으로 공사비를 290억 원 절감했다. 탄탄한 이론들에 비해 다소 허술하고 황당해 보이던 유조선 공법은 ‘정주영 공법’이라고도 불리며, 뉴스위크와 타임지에 소개됐다
거인의 도전과 시련
88년이 지나고 5공 청문회에 불려 나가 젊은 의원들에게 봉욕을 당하기도 한다. 오랜 숙원은 아녔지만 당시 정치권의 아니꼬운 작태는 거인을 정치판으로 끌어내게 한 불가피한 측면도 있었을 것이다. 당시 대통령 후보였던 김영삼에게 도전장을 내밀었지만 결국 대권을 얻는데 실패한다. 그 대가는 세무사찰과 현대그룹 해체라는 소문이 돌 정도로 참혹했다.
그가 우리 국민들에게 남긴 메시지는 참으로 거대한 울림이 있다.' 하면 되고 안되면 되게 하라!!'는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와 맞물려, 거인의 족적은 실로 대단했다. 우리 국민들의 면면에 흐르는 '다이내믹'과 '에너제틱'의 산표본 아녔을까?, 우리 겨레의 수천년 가난의 사슬을 끊어낸 자신감의 뿌리가 그로부터 시작되지 않았을까?. 우리가 선진국이 된 배경에는 거인의 몫도 당당히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 시대의 젊은이들은....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청년들은 정주영 회장을 어떻게 평가하고 생각할까? 타인의 일로, 재벌 회장의 당연한 행보로 여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는 누구보다도 근면 성실했다. 또, 누구에게나 짓눌려 있던 시대의 가난을 정면으로 돌파해 보려는 의지가 있었고 ,사물의 이치를 꿰뚫어 보는 혜안이 있었고, 아무리 악조건 속에서도 꺾이거나 주눅이 들지 않았다. 자신의 일에는 주도면밀하고 철두철미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되는 이유를 찾았고, 해보기 전에는 아무도 모른다는 " 이봐 해보기는 했어!"라는 평범하지만 거대한 가르침을 온 몸으로 체득하고 실천하는 것으로 평생을 살다 간 간 거인이다. 역사에서 가정은 부질없다지만 만약, 정주영 회장이 이 시대에 대학생이였다면 어떤 학생이였을까? 열심히 공부만 했을까? 학자금 대출을 받았을까?
학자금 대출을 받았다면 졸업 전에 갚았을까? 갚았다면 어떤 방법이였을까? 또 졸업한 평범한 대졸자였다면 그는 어떤 처신을 했을까? 시대적인 상황을 비관했을까? 취업에 몰두했을까?.창업을 했을까?. 스펙을 늘리기 위해 동분서주했을까?,
아니면 날 품 파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면서 훗 날을 도모했을까?하며 무던히도 궁금해지며 밑도 끝도 없는 질문 공세를 퍼붓고 싶어진다. 필자만 그런걸까?.
거인의 발자취는 그대로 따라가기에도 버겁지만, 우리 시대는 정주영 회장과 같은 분이 있어서 자랑도 되었다.엄청난 거인의 무용담에 뿌듯해지기도 했다. 때론 위로도 되었다. 당시 우리 국민들의 삶 자체는 버겁고 힘들었지만 그래도 행복한 변명, 핑계마져 있기도 했다. 내가 가난하고 힘들게 사는 것은, 정주영 회장만큼 부지런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도 안 되는 사족까지 붙이면서 말이다. -끝-